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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칼럼0. 아주 곧잘적인 사랑에 대하여 본문

글/감성티쳐

연애칼럼0. 아주 곧잘적인 사랑에 대하여

흐바흐바 2012. 8. 27. 23:02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농촌 출신이지만 일류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 남자의 집은 가난하다. 부모는 노쇠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병들어 있다. 남자에게는 배우지 못했고 무능하며 그래서 늦도록 결혼하지 못한 형이 하나 있다. 그리고 아직 학교를 마치지 못한 네 명의 동생이 있다. 그의 가족들은 남자가 결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가족에게 희망이었다. 그의 부모는 잘난 아들이 얼른 결혼하고 출세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서울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다.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교양 있으며 적당히 싹싹하고 적당히 예쁘다. 별나게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사랑을 넉넉하게 받으며 남들만큼은 곱게 자란 여자다. 굳이 흠이라면 공부를 좀 못해서 전문대를 졸업했다는 것 정도.

남자와 여자는 대학 시절에 만났고 사랑을 했다. 나이가 차고 결혼을 생각하게 되면 여자는 엇비슷하게라도 며느리 노릇을 하게 된다. 장래의 시부모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나서라면, 명절 때 맞추어 선물도 해야 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거들어야 할 때도 있다.

물정 모르는 남자의 부모는 여자에게 온갖 타박이 많다. 세상에서 자기 아들이 제일 잘난 줄 아는 그의 부모는 전문대밖에 안 나온 평범한 여자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 게다가 대책 없이 형제 주렁주렁 매달린 남자가 여자에게 쉽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갈등은 종종 도를 넘어 진행되어 버린다.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 믿고 다른 모든 것을 참아내고 있다. 그런데 남자는 때로 참을 수 없는 무기력과 무책임을 보인다. 남자의 부모는 여자 처지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남자는 참고 이해해 달라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중얼거릴 뿐이다. 자기 답답한 것은 제쳐두더라도 여자는 부모와 자식 싸움 붙이는 것처럼 되어가는 자신의 처지가 견디기 어렵다. 이쯤 되면 여자의 친구들 전화통만 바빠지고, 남자의 친구들 술사야 하는 일만 늘어난다.

 

또 한 쌍의 여자와 남자가 있다. 그 둘은 같은 서클 출신으로 대학 시절에 만났다. 주의의 선망을 받던 잘나가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자신의 삶이 힘겹다. 그 둘은 함께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 주변의 억압적인 남녀 관계에 함께 분노하기도 했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굳은 약속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의 관계에서만은 인간다운, 소위 진보적 관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가사 노동은 적절히 분담하고, 출산과 육아는 두 사람의 합의 하에 결정한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둘은 동갑이었다. 남자는 군대에 가야 했고 여자는 기다렸다. 여자가 먼저 졸업을 했다. 동갑내기들의 연애가 늘 그렇듯 여자는 나이가 많아졌고 시집가라는 집안의 성화 다 뿌리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쌓아갔다. 남자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구했다. 더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정을 아직 버리지 못한 그가 구한 직장은 보수나 대우에서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구할 수 있는 직장도 그리 뾰족한 것은 못된다. 두 사람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동거를 시작했다.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살림은 가사 노동의 무게를 몇 배 힘들게 했다. 집안일도 집안일이지만 두 사람이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사회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점점 더 기대기 시작했다. 사회적 활동에서 계속되는 좌절을 겪은 여자는 차츰 남자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웃어넘기기에도 가벼운 사소한 일들, 예를 들면 남자의 대학 시절 친구나 아니면 함께 일하는 여자들의 전화에도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한 유치한 짓거리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종종 푸념을 한다. 예전의 그 당당하고 자유롭고 생기 있던 모습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한다. 그것은 질책이기보다는 안타까움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남자는 많이 노력한다. 여자의 일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도움이 될 만한 책이나 자료를 구해다 주기도 한다. 여자는 점점 더 의존적이 되어가고 전에는 경멸해 마지않던 ‘보통 여자’처럼 변해 간다. 남자의 술이 늘었다. 자유롭고 평등한, 그래서 아름다운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기대는 이제 안타까운 미련으로 말라가고 있다.

 

신동윤, 송재희. <두 남자가 쓰는 사랑에 대한 희망>

 

 

 

위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야기. 그런데 이 두 가지 형태의 사랑 이야기는 1995년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15년 이상 된 책에서 발견한 것 치고는 지나치게 일상적인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숨 쉬는 것처럼 곧잘 사랑이야기를 한다. 영화 <LOVE ACTUALLY>의 제목 그대로처럼 사랑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사랑받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 많고 많은, 한 편으로는 지난한 사랑 이야기가 곳곳에 널려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하는 사이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연애 과정 중에도 서로 더 큰 사랑을 갈구하다 이를 진짜 줄 것 같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곧잘 이야기되는 사랑임에도 우리는 곧잘 사랑을 하지 못한다. 정준하가 애가 닳도록 불렀던 노래. ‘결혼이 아니라 사랑’을 원한다는 그의 진지한 외침이 진정성을 갖는다 칭송 받는 데에도 모두가 사랑을 곧잘 하지 못한다는 어색하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고려하게 만들까. 무엇이 우리를 재고하게 만들까. 무엇이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까. 무엇이 우리를 뛰어들지 못하게 할까.

 

여타 다른 연애 전문가처럼 올바른 정답을 제시하고자 시작하는 게 아니다. 다만 ‘생각’을 해보자는 하나의 제의이다. 그리고 좀 더 ‘본질적인 나’에 다가가길 바란다. 행복이나 기쁨, 슬픔과 같은 추상적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그 흐릿한 명제에서 ‘자신’을 도출해내길 원하는 마음에서다. 자신(me)이거나 또 다른 자신(confidence), 그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미 도약의 문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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