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True?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본문
1. 이론적 배경 - 표현주의
표현주의 사조는 영화에 나타난 것보다 일찌감치 독일의 미술과 연극에서 사용되었다. 표현주의의 정의를 내리자면 ‘사실주의 미학에 반기를 든 예술사조’로 명명할 수 있다. 이렇듯 표현주의는 객관적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기피한다. 오히려 주관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전쟁 후의 영화는 더욱 피폐하고 암울한 모습을 띠게 된다. 세트도, 인물도, 심지어 조명까지 그 특색을 더한다. 또한 표현주의는 현실을 왜곡한다. 구부러진 모양과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세상에 드러나는 현실이 아닌, 숨겨진 근원을 찾아내겠다는 몸부림과 같다. 결국, 표현주의는 위와 같은 특징에 입각하여 ‘낯익은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이라면 무엇일까. 인간 대 인간의 만남 혹은 인간 대 자연의 만남일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인간 내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으며, 스스로도 이를 꺼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현주의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인간 내부 즉, 인간 영혼의 불안과 위협을 그 중심에 둔다. 다음 장(章)에서 다루겠지만, <밀실>의 처음 시작이ꡒ우리 주위에는 늘 영혼들이 있어. 그들이 따뜻한 가정과 처자식들에게서 나를 밀어내지.ꡓ라는 대사로 시작된다는 사실은 표현주의가 모색하는 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표현주의는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인 요소를 ‘양식화(stylization)’한다. 다시 말해서, 표현주의를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배우의 분장과 연기를 통해, 그리고 왜곡된 세트의 나열을 통해 어떤 것이 표현주의를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2. 역사적 배경
앞서 말했듯 <밀실>이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라면 그 시작이 1919년이다. 1919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1914년부터 18년까지 진행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잃은 것이 많았다.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에 더불어 독일인은 ‘패배의식’이라는 정신적 고통을 떠안았다. 독일인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현실마저도 ‘패배자’ 독일인에게 희망이 되지 않았다. 외면적으로는 공화국이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군주제에 머물러 있던 독일은 가치 갈등이 극심한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화폐를 마구잡이로 발행하면서 부메랑처럼 날아든 당시의 인플레이션은 ‘마르크를 가지고 노는 소년’이라는 유명한 사진이 잘 보여준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독일인으로 하여금 ‘집단적 심리불안’을 이끌어냈다. <밀실>이 연쇄살인범을 다루었다면, <노스페라투>는 흡혈귀를, <Metropolis>는 미래 인간사회를 굉장히 암울하게 그렸다는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Siegfried Kracauer는 100% 스튜디오 촬영을 한 <밀실>을 놓고 “패전후 독일인들의 집단적 패배의식으로 인해 독일영화가 야외로부터 스튜디오의 울타리 안으로 피신했다”고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3. 분석
영화는 가장 먼저,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벤치도 없는 실외 바닥에 앉아있기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실내로 착각하기 쉬우나, 이야기를 꺼내는 배우의 약혼녀 ‘제인’이 먼 곳에서 걸어옴으로써 이 곳이 무덤가나 풀숲처럼 보이는 실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려주는 징표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가 무덤가이든, 단순한 풀숲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들을 비추는 조명과 인물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또 첫 장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결말이 첫 장면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끝까지 다 봐야만 이야기를 꺼내는 인물이 몽유병자인 ‘세자르’에 의해 살해당한 ‘알란’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자르를 조종하는 칼리가리 박사의 비밀을 파헤치는 인물 ‘프랜시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 때문일까. <밀실>을 ‘반전 영화의 효시’라고 칭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가장 처음, <밀실>의 결말은 세자르를 조종하는 칼리가리 박사의 횡포를 통해 국가를 조롱하는 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칼리가리 박사를 ‘히틀러’의 존재와 동일시해서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본인은 바뀐 결말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싶다. 영화를 다 본 이들은 허탈할 수도 있다. 결국 국내 영화 ’장화홍련‘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정신병자의 허황된 이야기로 칭하기에는 영화가 주는 의미가 크다. 사실 국가를 비판하는 일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야 가능한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마저 빠듯한 시점에 국가를 비판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호소력 짙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국가를 탓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 독일인의 심적 정서에 맞지 않았을까. 전쟁부터 정치적․경제적 공황이 모두 국가와 연결되는 것이지만, 국가를 탓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생각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일인이 처하게 된 모든 상황이 국가 때문인데, 즐기러 온 영화에서조차 국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의 상황처럼 모든 음울한 상황이 한 순간에 반전되어 당시의 어려움도 한 순간에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첫 장면의 제인이 걸어 나오는 모습은 흡사 우리의 ‘전설의 고향’을 보는 듯하다. 소복 입은 귀신 즉, 죽은 사람은 아니지만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제인의 모습이 강조된다. 이 모든 것들이 피폐한 독일인의 정신상태를 말해주는 것 아닐까.
이제 영화는 본격적으로 (공간적 배경인) 홀스텐월(Holstenwall)에서의 일을 다룬다. 그런데 처음 등장한 홀스텐월의 모습이 놀랍다. 대게 도시는 물이 있고 새가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홀스텐월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붕이 뾰족한 집들이 한 치의 간격 없이 꽉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뾰족’하다는 게 우리 생활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상징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홀스텐월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길 한 모퉁이에서 중앙으로 칼리가리 박사가 등장한다. 옆쪽에서 중앙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어디에서 많이 본 듯 하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장면(scene)과 함께 인물은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나오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영화는 뚜렷한 연극적 요소를 부단히 가져온 것이다. 연극적 요소는 비단 인물의 등장에서만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배우들은 일부러 고개를 천천히 돌려 행동을 좀 더 뚜렷하게 만들고, 또한 몸짓 자체가 사전에 다 짠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표현주의 영화의 특징인 ‘사실적인 몸 연기와는 거리가 먼, 미장센이나 촬영기법과 어울리는 패턴화된 몸동작’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카메라가 무엇인가를 찍을 때, 찍히는 대상은 카메라 밖을 벗어나서도, 잘려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것은 현재 영화감독의 금기이자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국 PD들의 금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메라는 도는데 잠시 동안 배경에서 인물을 사라지는 모습을 <밀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연극적인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표현주의 연극에서 옮겨온 영향도 있고, 시대적인 한계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표현주의 영화’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즉, 자의식을 드러내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드디어 칼리가리 박사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오는 괴기스러운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요소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영화가 노력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먼저, 칼리가리 박사의 머리모양이다. 머리가 피아노 건반처럼 흰색, 검은색을 반복하는데 이 모양은 칼리가리 박사가 영화 내내 끼고 있는 장갑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칼리가리 박사가 손을 움직이며 제스처를 취할 때 머리모양과 겹치면서 한층 인물의 연기를 과장스럽게 보여준다. 물론 표정도 과장된 연기에 한 몫하며 분장도 역시 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분장은 칼리가리 박사보다는 세자르에 좀 더 치중한 느낌이다. 홀스텐월 박람회장에서 첫 선을 보이는 세자르가 ‘관’처럼 보이는 상자에서 처음 눈을 뜨는 장면은 정말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커다란 눈이 점차 떠지는데, 눈 주위의 분장이 이를 정말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윽고 눈을 한층 더 크게 뜨면서 과장된 표정 연기는 더욱 힘을 받게 된다. 또한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르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조명과 분장의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낸 힘일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가 몽유병자인 세자르가 23년 만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감상해보라고 외칠 때, 세자르의 그림은 입술이 올라가 있는, 슬프고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모든 요소가 처음 세자르가 등장한 장면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세자르의 모습은 앞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최초의 호러영화’라고 말하는 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당시 <밀실>을 보며 혼비백산하여 뛰쳐나가는 관객과 실신한 관객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야기가 아닌,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무서운 것들을 보는 관객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밀실>은 점차 자신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킨다. 바로 알란과 프랜시스의 등장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등장하면서 눈에 띄는 것은 홀스텐월 도시의 거리 모습이다. 알란과 프랜시스는 칼리가리 박사의 박람회에 가게 되고, 동시에 전체적인 도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도시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며 모이는 곳이다. 하지만 홀스텐월의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박람회 외에는 매우 한정적인 인물만이 거리를 누빈다. 그래서 거리 또한 전체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사람이 서있는 것 마냥 가로등 같은 것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러나 빛을 비추진 않는다. 완벽한 가로등은 아닌 것이다- 직선 길이 아니라 꾸불꾸불한 길만이 거리를 이루고 있다. 심할 때는 거리의 반이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서로를 만나는 곳에만 밝은 조명이 사용되는 까닭이다. 어떤 곳은 어둡고 어떤 곳은 매우 밝게 처리하는 모습은 <밀실> 영화 내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외에도 다른 거리가 등장하지만, 역시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거리로서의 요소는 전혀 갖춰지지 않은 곳이다. 계단을 형상화한 듯 층진 곡선이 눈에 띄지만, 이것은 실질적인 계단은 아니다. 계단이라 할만한 것은 거리가 아닌, 프랜시스가 경찰서를 향해 올라가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 계단도 실제적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앞 쪽은 그림자가 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인물의 모습이 작아질수록 즉, 인물이 경찰서를 향해 서서히 올라가는 장면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계단을 올라가고 있구나!’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는 인물이 가려는 장소에 도달하게 되면 문이나 창문을 뚜렷하게 처리한다. 마치 ‘이 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듯이. 그러나 <밀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새어나오는 빛으로 문의 모습을 형상화하지 않는다. 경찰서에 올라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면서 관객은 여기에 익숙해질 뿐이지, 그 장면만을 본다면 올라가서 도달하게 되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박람회에 간 프랜시스와 알란이 드디어 세자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알란이 세자르에게 ‘얼마나 살지’ 자신의 미래를 물어본다. 개인적으로 이 모습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표현주의 영화는 스토리를 묻는 영화가 아니다. 스토리 중심의 영화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정신을 ‘왜곡과 과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인 사조이기 때문에 표현주의 영화에서 스토리를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단순히 줄거리만 소개되는 정도이다.) 하지만 알란이 세자르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모습이 우리네와 흡사하여 눈에 띄었다. 즉, 우리가 어느 때 미래를 궁금해 하고 비과학적인 것을 알면서도 점쟁이를 찾아가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절박한 상태에 처했을 때 점쟁이를 찾아간다. 미래에 대해 물어보고 점쟁이의 조언을 구한다. 점쟁이를 많이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점쟁이를 찾아간다면 이 일을 분명 하고 온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 미래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독일인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계속 언급했듯이, 당시는 독일의 전무후무한 위기 상황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삶 속에서 희망이 없던 독일인들도 누군가 자신의 미래를 알려주길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사실 알란이 미래를 물어보는 장면은 전체적인 스토리에 비추어보면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다. 1700년대의 (진짜) 칼리가리 박사를 동경한 1900년대의 칼리가리 박사가 책에 나온 그대로를 실험해보기 때문이다. 세자르가 알란에게 ‘내일 새벽’까지 산다고 말하고 그 예언을 맞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이 <밀실>의 스토리이다. 하지만 스토리 관점이 아닌, 내면 심리적 관점에서 알란이 세자르에게 미래를 묻는 장면은 충분히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란이 살해당하는 장면에서도 표현주의 영화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가 알란의 방에 드리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알란의 표정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으로 알란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런 추측은 검은 그림자가 알란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더욱 확실해진다. 하지만 피가 튀기거나 비명이 나오진 않는다. 조명을 통해 벽에 그림자가 생기면서 알란이 살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이처럼 조명에 의한 간접적 재현방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장면묘사를 하는 요즘의 영화와는 전혀 반대되는 특성인 것이다. 표현주의의 간접적 재현은 외면적인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 회피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란이 죽은 뒤, 그의 절친한 친구 프랜시스는 경찰서를 찾아간다. 세자르는 용의선상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칼리가리박사를 의심스럽게 쳐다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점점 ‘위기’로 나아가고 있으며 71분짜리 영화는 중반부에 치닫는다. 중반부에 치닫자 <밀실>의 세트의 특징이 보이기 시작한다. <밀실>의 세트는 정형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민무늬의 세트도 없다. 세트인 것이 빤히 보이고, 또한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직선과 곡선이 분위기를 좀 더 난해하게 만든다. 또한 인물보다 세트가 카메라에 더 가깝다. 가끔 인물보다는 세트에 중심을 둔 구도가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현대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세트가 배현실적으로 왜곡되면서 캐릭터의 내면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세트가 캐릭터를 대신하는 모습을 <밀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먼저, 칼리가리 박사가 박람회에서 얻은 장소는 정형화된 네모가 아닌 사다리꼴에 가깝다. 사다리꼴도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표현주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행여 중력에 의해 한 쪽으로 쏠린 것 아닐까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칼리가리 박사의 내면을 보여주는 세트에 불과하다. 또한 세자르와 같이 있는 집도 이와 유사한 모습을 띤다. 창문도, 문도, 지붕도 우리가 은연중 생각하는 보편적인 집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세자르와 칼리가리가 머무는 집 옆에는 사람 키가 훌쩍 넘는 울타리가 있다. 울타리의 기능이 무엇인가. 남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 까치발을 서면 집이 들여다보이는 울타리가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넘어서야 할 정도 길이의 울타리를 설정함으로써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광기에 사로잡힌 칼리가리 박사의 내면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세트가 캐릭터를 재현하는 모습을 <밀실> 전체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에서 프랜시스의 집은 한차례 등장하는데, 바로 알란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온다. 이 때, 놀라는 프랜시스의 배경에 집(방)이 보인다. 집은 여전히 평범하지 않다. 마치 지붕이 내려앉은 것처럼 규칙적이지 않고, 창문 역시 네모로 정형화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외의 것들은 (명암인 것도 있지만) 검정색으로 처리가 되어 벽과 그 안의 공간 차이를 명확히 두지 않는다. 프랜시스가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알고 본다면 프랜시스의 방이 알란의 방보다 더욱 비좁고 우울하게 그려졌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유일한 여자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인과 관련해서도 드러난다. 처음에는 곡선으로 된 세트와 보라색 빛의 조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밀실>에서는 볼 수 없는 따뜻함이다. 그러나 제인이 세자르에게 납치될 때는 제인의 방이라 할지라도 다른 장면과 마찬가지로 어둡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밤이라는 상황과 함께 캐릭터가 긴박한 상황에 처했음을 분위기가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세트가 캐릭터의 상황을 보여주는 예도 있다. 칼리가리 박사에게 윽박을 지른 마을의 사무소 서기(the town clerk)가 살해를 당하게 되는데 이를 확인할 때 비춰주는 세트의 모습은 ‘칼이 세트 안으로 들어왔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은 칼이 아니라 창문이지만, 창문의 모습이 칼의 모습과 매치되면서 뾰족한 것에 찔려 죽은 사무소 서기의 상황과 연결되는 것이다.
영화는 세자르가 제인을 납치하는 모습을 통해 그간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때, 제인을 납치하면서, 또 가족들이 이들을 따라가면서 보이는 길은 도시의 세트보다 더 왜곡되어 있다. 길은 지그재그 형태를 띠고 있으며, 나무 역시 구부러져 여기저기 무성한 가시만 자라나고 있다. 또한 길은 흡사 가시덤불을 연상시키는 듯 계속 험한 곳으로 표현된다. 세자르와 칼리가리 박사의 왜곡된 자아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결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결국 세자르는 제인을 납치하는 데 실패하고 칼리가리 박사는 여러 사람에 의해 궁지에 몰리면서 서서히 결말로 치닫는다. 그 와중에 프랜시스는 범죄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실천하듯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칼리가리 박사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작업을 펼친다. 프랜시스의 발걸음은 이제 칼리가리 박사의 정신병원을 향한다. 그런데 정신병원에서도 우리는 표현주의를 읽을 수 있다. 정신병원의 내부 바닥이 가늘고 얇은 피자 조각의 모습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았을 때 피자조각에 가깝고 사실은 어떤 동그란 유리나 거울이 깨졌을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과 가깝다. 돌렸을 때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내부 바닥이 네모가 아닌 뾰족한 세모인 점은 정신병을 치료하는 병원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처음 프랜시스가 중심점에 서있고 다른 의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을 때는 인물 자체가 크게 부각되는 느낌이다. 또한 이 정신병원이 칼리가리 박사가 세자르를 처음 만났으며, 그를 세뇌시켰던 즉, 광기 어린 칼리가리 박사의 음모가 서려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매치가 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영화는 결말에 다다랐다. 이야기를 끝낸 프랜시스가 자리를 뜨는데 이윽고 이어지는 공간이 칼리가리 박사의 정신병원이다. 동시에 넋이 나간 표정의 제인이 화면에 비친다. 그리고 몽유병자인 세자르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모습이 나타난다. 이 때까지도 의심하지 못하던 관객은 프랜시스와 제인의 대화를 통해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프랜시스가 그녀에게 “제인, 사랑해. 나와 결혼해주겠어?”라고 하지만, 그녀는“우리 여왕들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어.”라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결국 세자르도, 프랜시스도, 제인도 칼리가리 박사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결국 프랜시스의 상상 안에서 칼리가리 박사가 갇혔던 독방은 프랜시스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프랜시스가 100% 정신병자라는 확신은 내릴 수가 없다. 프랜시스는 마지막까지 “당신들은 모두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저 원장이야!”라는 대사를 한다. 프랜시스가 진짜 정신병자로 비정상적인 칼리가리 박사의 음모를 상상했을 수도 있지만, 정신병원의 원장인 진짜 칼리가리 박사가 프랜시스를 정신병자로 음해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세자르를 세뇌시키지 않은 칼리가리 박사가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이 사실을 우연히 안 프랜시스를 정신병자로 낙인찍었을 수도 있고, 세자르를 포섭하는 데 실패한 칼리가리 박사가 엉뚱한 데에 화살을 돌려 프랜시스를 정신병원에 이끈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열린 결말이 당시 제작자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미래의 영화학도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본인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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