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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

흐바흐바 2009. 8. 11. 11:45



1. 이론적 배경 - New Italian Cinema의 대두

  파시즘의 붕괴, 이탈리아의 경제력 상승, 관객의 욕구 이탈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후,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였다. 이름하여 “New Italian Cinema". 이는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하였지만, 누벨바그의 영향 등을 받아 혁신적인 성격을 보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연결되는데, 2번에서 다룰 파솔리니 개인의 삶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혁신적인 성격은 1960년대 흐름과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당시 시대는 ‘가치관과 도덕성의 변화’로 점철되었다. 이탈리아의 집단적 상황에 관심을 보였던 네오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의 내면과 개개인에 중점을 둔 개인의 심리나 의식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 뉴 이탈리안 시네마라고 할 수 있다.


2. 감독 파솔리니에 대하여

  <소돔>의 감독 파솔리니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이유는 1번에서 살펴보았듯이, 뉴 이탈리안 시네마가 집단적 범위에서 개인으로 추구하는 범위를 좁혔기 때문이다. 이때, ‘개인’이라는 것은 영화의 대상이자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해야 영화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영화를 만들기 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의 길을 걷기도 한 파솔리니가 본격적으로 영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뉴 이탈리안 시네마의 또 다른 한 축인 페데리코 펠리니를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그 둘은 네오리얼리즘의 감상적인 면을 지양하고 문체적인 요소들을 복합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공유함으로써 그들의 ‘매너리즘적인 창조적 감수성’을 영화에서 구현시키고자 하였다.그 후 파솔리니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절대적인 단순함과 전형적인 표현’으로 대표되는 초기방식은 '빈곤과 무심함, 잔혹함, 조악함과 꼴사나운 현실‘을 제대로 현실화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또한 촬영 면에서는 전경은 멀리찍기와 이동 카메라로 표현되었으며, 인물 등은 선명한 고뇌를 띄며, 파솔리니의 실험 양식을 잘 보여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 모든 것들은 부자연스러운 화면으로 표출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파솔리니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효과적인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내용면에서는 더욱 더 파솔리니 개인의 사상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의 심연에 깊이 잠들어 있는 고뇌는 ’섹스‘로 표출되었다. 섹스는 그의 상상력을 현실화했고, 행복을 갈구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결국 이 모든 요소가 가장 극대화되어서 표현된 파솔리니의 역작이 <소돔>인 것이다. 초기작과는 약간 다르며, 그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유명하지만 파솔리니 특유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돔>은 의미 있다. 마지막으로, 파솔리니가 <소돔>에 대해 내린 평가를 인용하며 본격적인 영화분석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권력은 역사를 파기하고 자연을 극복하고 싶어 한다. 역사와 자연은 섹스를 통해서만 파기되고 극복될 수 있다.”



3. 영화 분석

  먼저, 영화제목은 곧 <소돔>에 대한 포괄적 전제이다. ‘살로’는 이탈리아의 거대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별명이다. 또한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는 영화의 제목의 원제가 ‘Salo, Or The 120 days Of Sodom’인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or‘의 의미이다. or은 ’또는‘ 혹은 ’아니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논리가 아니다. ’이것‘을 택하거나 ’저것‘을 택하거나 혹은 ’이것과 저것‘ 모두를 택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또는‘이다. 어떤 것을 택하든 살로는 곧 소돔의 120일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만약 or가 ’아니면‘이라면 의미는 좀 더 살벌한 모습을 보인다. 흡사 “당신은 살로가 아니면 소돔의 120일을 택할 것인가? 소돔의 120일이 어땠는지를 보았는데도?”라 물어보는 듯 하다. 결국 이것도 살로와 소돔의 120일에 차이를 정의하지 못하는 쪽으로 귀결된다. 즉,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서론에 파솔리니의 ’인간군상‘이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모두를 잘 살게 만들려고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적 행위 역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인간에서 출발한다. ’파시즘‘이라는 가장 정치적 행위가 인간적인 행위로 해석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파시즘이라는 것이 어떠한가. 소돔의 120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바로 파솔리니의 결론이다. 선택의 권리를 선사하면서 동시에 선택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모순 속에서 파솔리니는 관객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돔‘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의 이름이다. 앞으로의 영화 전개가 예상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언급해주면서 출발한다. ‘나치-파시스트 점령하의 북부 이탈리아. 1944-45’. 이렇듯 예측이 아닌 직접적으로 배경을 말해줌으로써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노라고 즉, 파시즘과 연관해 보아달라는 감독의 요구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대통령, 의장, 주교, 공작으로 스스로는 표현하는 무리는 ‘피지배자’를 찾아 나선다. 그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함도 목표지만, 우선 그들이 ‘지배자’로 불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지배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대와 세계를 막론하고 있는 일이다. 누군가가 지배를 하면 누군가는 지배를 받아야 한다. 모두가 잘 살기를 기원했던 사회주의도 그들을 진두지휘할 지배자를 필요로 했으며,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과 같지 않은가. 사실 이런 점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당위적인 것이지만, 파솔리니는 파시즘이 만연하던 시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게 느꼈을 것이라 짐작된다.

  무리는 그들의 ‘욕구 해소’ 무리를 만나기에 앞서 각자의 딸을 법적 배우자로 맞이할 것을 결의한다. 이 부분에서 연상되는 바는, 권력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나누어왔던 역사와 이를 야기한 권력의 속성이다. 이를 '약정사항‘에 대한 준비작업이 끝났다’는 대사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더욱 권력자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무리가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거대 권력, 남들이 침범할 수 없는 권력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딸도 피지배자 입장에서 보면 확실한 지배층이지만, 권위적인 아버지에 맞서 반론의 ‘반’조차 꺼내지 않는다.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것, 예를 들면 자식이나 살육 등에도 동요하지 않는 ‘인간 외의 인간’임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선별기준은 중요하지 않다. 개개인의 미적취향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제외하는 방법은 단 하나. 몸에 결점이 있다는 것. 결국 몸 외에는 어떤 것도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 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벽해야 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기준은 몸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떻게 아이들을 선발했으며, 그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은 나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 정치 행태의 일원화된 속성, ‘권력에의 욕망’이 몸으로 전이된 것 아닐까. 종교와 법이 허용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연하다. 오직 한가지만을 추구하는 한, 인간의 삶을 우월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배려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이제 「기벽의 장」에 들어서게 된다. 영화는 전체 4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옥의 문」, 「기벽의 장」, 「똥의 장」, 「피의 장」이다. 이후로는 배경이 성(城)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성(性)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파솔리니는 자신의 사상의 분출구의 일종을 성(性)에서 찾았다. 영화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가학적인 성과 강간, 성기 노출 등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빈도수가 높다. 이렇기 때문에 선정적인 면만 보고 <소돔>을 최악의 영화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을 역겨운 가학적인 담론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파솔리니가 얻고자 했던 의도를 파악해야만 한다. 왜 파솔리니는 이런 부분에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고자 한 것일까. 파솔리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떠나 인간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현대인들에게 성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숨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에 반감을 느낀다. 또한 정치에다가 성적 이야기를 다루는 것 또한 금기사항의 일종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3대 본능이자, 인류를 유지시켜주는 근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요성에 비해 현대인들은 위와 같이 성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파솔리니는 이에 울분을 느꼈을 것이다. 섹스만이 인간을 극대화시켜주는 요소인데 이를 억압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솔리니는 현대의 성 담론을 비틀어 오히려 성을 제시한 면이 있는 것이다. ‘가장 해괴한 기벽일지 몰라도 섬세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본성’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 파솔리니가 얼마나 성적 측면을 인간의 본능과 연결시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숨겨진 논의를 사회적으로 끌어내보고자 한 면도 있다. ‘관능적인 쾌락을 선사하는 것은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 특권이오’라는 대사가 이를 말해준다.

  그 다음으로 제시되는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다. 퇴락한 매춘부가 말하는 대로 똑같이 실행되는 <소돔>은 이야기가 1차 충격을, 그에 이어지는 영상이 2차 충격을 준다. 그리고 이윽고 끌려온 소년과 소녀들은 ‘개’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바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에서 올라오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한다. 이제 비로소 관객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관객들은 앞으로 소년과 소녀들에게 어떤 가학적인 행위가 가해질지, 어떤 역경을 지나갈지에 대해 자연스런 공포심을 가지게 된다.

  개처럼 짖어대는 소년과 소녀들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개처럼 짖어대는 그들에게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솔리니는 이 장면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간은 항상 말을 하지만, 말은 항상 말이 아닌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파솔리니는 자신의 말이 자꾸 왜곡되는 데에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의미가 없는 이야기는 소음이다. 개가 짖어대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혹자는 파솔리니가 그의 독단적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무하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시나 영화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사회에 대한, 세상과의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파솔리니가 느꼈을 절망적 상황이 <소돔>을 통해 점점 가학적 행위로 표현되는데, 다른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절망에 빠질수록 극단적이 되고 마지막엔 자포자기 상태) 파솔리니의 행적이 ‘그저 그런’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똥의 장」에 온 뒤 영화를 보기 힘들어하는 관객이 분명 있을 것이다. 매춘부의 이야기에 따라 <소돔>의 전원이 대변을 먹는 장면 등,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소화하기 힘든 충격적 장면들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년과 소녀들과는 달리 우적우적 맛있게 대변을 먹는 ‘지배계층’이 모습이, 점점 더 그 가학적 성향이 심해지는 것을 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구역질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대변’에 대해 좀 더 바꾸어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도 나올 수 있다. 대변은 생명체에게 2차적인 산물이다. 일단은 ‘무엇을 먹어야지 대변이 나온다는’ 1차적 진리에 충실한 과정이 지나야 이것들이 대변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변의 사회적 의미는 변해왔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대변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랑스러운’ 배설물이었다. 무엇인가를 먹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철저히 숨겨야 하는 것, 표면에 드러내면 더러운 것으로 전락한 것이 바로 대변이었다. 파솔리니도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고 만들었을지 않을까. 대변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전(前)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며, 이에 대한 의미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먹는 행위 바로 뒤의 행위와 이를 또 다시 먹는 것으로 연결시키면서 먹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정치는 피지배자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한다’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똥의 장」을 거치면서 화면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인물들도 더 음울한 분위기를 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순간 사팔뜨기인 한 지배자가 화면을 똑바로 보는 장면이 제시된다. <소돔>을 역겹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이미 영화관을 나갔어도 한참 전에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남아있으면서 역겨움을 보는 관객들에게 화면을 똑바로 본다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까.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또한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역겨워만 했던 지배자와 마주하는 꼴이 된다. 인간이 인간과 마주할 때는 언제인가. 이야기를 하는 등 어떤 의미로 ‘의사소통’을 할 때 가장 많이 상대를 마주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마주봄‘을 기피할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장면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가 이해간다. 결론적으로, 아마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에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곧바로 장면은 전환되지만, 많은 관객들의 뇌리 속에 남았을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똥의 장」에 오면 그때서야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이야기를 듣는 때가 ‘소돔’에서 가장 평화롭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곳곳에서 반발이 감지되지만 반발은 곧 음담패설과 문란한 행위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행위를 좀 더 정치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는 일종의 ‘세뇌’이다. 세뇌는 인간을 사회에 적응하게 만들고, 이해하게 만들며, 열광하게 만들기도 한다. 후에 폭력과 억압 때문에 파괴되는 인간성을 모여 줌으로써 ‘세뇌’는 구체화된다. 즉, 나중에 소년, 소녀들이 권력에 반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배신하고 고발하게 되는 장면이 제시됨으로써 권력에 적응하고 세뇌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영화가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소돔’의 사회에 적응하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피지배자가 있다는 점을 보며 우리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면은 씁쓸하지만, 인정을 하게 되는 이유. ‘인간’이 ‘인간’을 다룬 장면을 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름’을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소돔>에서는 지배층이 피지배층보다 사람 수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배층이 피지배층이 누구인지 일일이 다 알지 못한다. 이름을 물어보는 행위는 곧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지속적으로 권력만을 추구하는 지배층을 비꼰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공직자들이 국민들의 이름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공직자를 선출한다. 그러나 <소돔>에서는 이러한 과정조차 없다. 이름 따위는 욕구를 채우는 데에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역시 앞선 장면과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연관시켜본다면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한번쯤은 끌려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법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으며, 대사도 거의 없다. 파솔리니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파시즘’이라면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필요 없는 게 당연하다. 철저히 지배층의 시각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점이 영화의 악평을 불러오는 요소라도, 얼마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파멸시키고 타락시킬 수 있는지가 보이면서, 파솔리니가 이러한 ‘인간군상’에 많은 염증을 느꼈음을 이해하게 되며,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 정치 행위가 불러올 파멸을 예감할 수 있게 된다.

  「피의 장」은 처벌 목록에 오는 소년과 소녀들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통해 그 충격을 극대화한다. 성기를 불로 지지거나, 머리 가죽을 벗기거나, 눈알을 빼는 장면 등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FINE이 뜨는 순간 관객은 이 잔인함에 대한 어떠한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의 시작점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파솔리니는 지독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이 잘 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며, 이 주제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파솔리니가 생각하는 인간의 범위.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성적 측면에서 강화되어 나타난 결과물이 바로 <살로, 소돔의 120일>인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치자와 피치자) 그리고 지배자에 협력하는 피지배자. 그러나 어느 의미에서 그들은 준지배자. 피지배자보다 권력의 우위에 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영화의 결말에 두 가지 행동으로 나타난다. 온갖 음담패설을 함께한 피아노를 치던 한 여자는 고문이 시행되는 장면에서 ‘자살’을 택한다. 다른 한 무리는 지배자가 하는 행동을 알지만, 춤을 추면서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눈감아야 하는 상황이거나 혹은 그들도 이미 지배자의 행위를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인간다운’관점에서 무엇이 옳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옳은 것은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행위와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 모두가 도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에 근거해서는 후자가 확실히 ‘나쁜’ 쪽이지만, 본질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나쁘다’는 잣대를 대는 것이 ‘판단할 수 없는 부분에 판단의 잣대’를 제시한 것이므로 ‘나쁘다’. 옳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더 이상 이보다 절망적일 수는 없는 영화 내용에 파솔리니의 생각이 담겨있다. 인간은 나쁘다. 파솔리니가 당시 얼마나 절망적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피의 장」을 마치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영화는 ‘끝난다.’ 앞의 이론적 배경에서 인용한 책인 『평전 파솔리니』의 저자는 이 책의 부제목을 ‘죽음과 삶의 몽타주’라 덧붙였다. 왜 죽음과 삶인가. 삶이 있다면 반드시 죽음이 뒤따르며, 또한 생명체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 아닌 호사가 죽음인 것을 감안한다면, 죽음과 삶은 곧 인간의 것이며 그 자체가 인간이다. 다만 짚어보아야 할 점은 흔히 ‘삶과 죽음’이라고 일컫지만, 책은 ‘죽음과 삶’이라고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의 인간들도 삶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그의 평소 생각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작품 (시나 영화)를 본다면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상(像)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감독은 죽음에 대해 꽤나 고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영화의 마지막을 ‘피의 장’으로 마무리한 것 아닐까.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답게’죽는 것인가. 답은 없다. 파솔리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운 모습이 영화 전체에 사려있는 모습을 보고 혹자는 ‘역겹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도 ‘인간은 죽는다.’

  파솔리니는 영화를 극한의 절망적 상태로 만들었다. 이는 시대적 상황과 연결된다. 당시에는 네오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하는데, 파솔리니는 많은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파솔리니가 살해당할 당시 세 명의 청년이 “더러운 공산주의자”하며 폭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이런 시대가 파솔리니를 절망적 상황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도 “역겹다” “더럽다” 등이 다수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조차 절망적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한 누리꾼의 평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파솔리니는 모두에게 있지만, 사회적으로 합의 해주지 않는 인간의 이면을 제시하면서, 절망이 인간의 바탕에 항상 존재함을 일깨워준다. <소돔>은 그런 영화이다.

살로 소돔의 120일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1976 / 프랑스, 이탈리아)
출연 파올로 보나첼리, 캐터리나 보라토, 마르코 벨로치오, 라우라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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