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배경
장이머우 감독은 1950년생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진짜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차후 중국의 ‘공산당’을 짊어지게 되는 사람들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의 움직임은 문예정풍과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으로 이어진다. 특히, 후자의 문혁은 봉건을 타파하자는 명목을 앞세워 전통과 인간 본성을 모두 파괴하는 끔찍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문혁은 1966년에서 76년까지 약 10여년간 이어졌는데, 밑에서 소개할 5세대 감독들은 꿈 많은 사춘기, 청년기 시절을 바로 이때 보내게 되었다. 결국 사회주의와는 전혀 걸맞지 않은 사회상이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포장되는 시기는 많은 중국인들에게는 암흑기였으며, 5세대 감독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크게 잘못되었던 일들이었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5세대 감독들에게는 봉건에 대한 비판 및 사람을 위한 영화 제작에 대한 신념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그들의 영화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2. 제5세대
5세대(the fifth generation)는 국내의 X세대나 N세대와 같은 특정 연령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학교를 같이 졸업한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 특정학교란 바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문을 열게 된 ‘북경영화학교’를 가리키며, 이 학교를 5기에 졸업한 학생들을 바로 ‘5세대’라 부르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듯 한 '세대‘로까지 묶이게 된 이유는 5기에 졸업한 학생들이 비슷한 사회적 경험을 겪고 기존 영화의 질서를 타파하는 새로운 질서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신념은 5세대 감독들의 초기 영화에서 엿볼 수 있다.
하방 등 문혁기 당시를 고스란히 겪은 그들의 세계관은 먼저 1911년의 5.4 신문화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중국이 보수적 틀을 버리고 근대적인 국가로 태어나게 하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5세대 감독들이 이를 직접적으로 겪은 것은 아니나, 변화를 원하는 중국의 움직임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도 퍽 매혹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혁명 찬양 등의 영화가 아닌,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다짐 역시 이 운동의 가치관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기존의 패턴이 아닌, 내러티브와 형식을 비판 위주로 이끌어가는 전략과도 연결된다.‘비극, 부조리, 모호함’으로 귀결되는 것이다.다수의 5세대 감독들의 초기작 주요 소재가 ‘봉건의 퇴폐적 악습 비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다.
이런 현실에서 영향을 받은 5세대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영화의 대상이 철저히 인간 위주였으며, 이는 문혁에 대한 비판 의식과 연결된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찍는 장소에 있는 일반인을 영화에 출연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인공적인 것을 배제하는 ‘무위자연’과도 맞물리는 부분이다. 작위적인 것 즉, 투쟁이나 계급 등이 없어야 아름답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기존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여백의 미 등을 화면 안에서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본 비평문의 뼈대가 될 ‘형식주의적 양식’이다. 미장센을 통해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색채미학을 구사하려 했으며, 촬영기법도 이와 유사하게 구도 및 앵글에 기존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롭고도 놀라운 변화를 주었다. 형식주의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것이다.
3. 분석
장이머우 감독 역시 위에서 서술한 것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감독으로서 그의 첫 작품인 <붉은 수수밭>에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현장의 일반인을 영화에 투입시켰다. 이런 것이 바로 장이머우가 생각하는 리얼리티 중 리얼리티였다.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데에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결국 이를 통해 ‘진짜 모습의 중국, 모습 그대로의 중국’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바로 장이머우 감독의 의도였다. <붉은 수수밭>이후, 장이머우 감독은 이제 일반인 등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화면으로 인간을 보여주기로 결심하였고, 이것이 바로 <홍등>이다. 결론적으로, 리얼리티의 극대화이든, 미장센이든 이는 장이머우 감독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추구했던 ‘영화 미학(美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화면을 꽉 채우는 한 여인네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영화를 계속 보다보면 그녀의 이름은 ‘송련’이며, 바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봉건적 삶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에게 부자의 첩으로 시집을 갈 것을 요구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얼굴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송련이 시집을 가게 될 부잣집이 나오기 전 어머니와 송련의 대화에서 송련 외의 것은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송련의 남편이 되는 ‘대감’님의 얼굴 역시 한번도 제대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앞으로 영화의 전개가 이 인물에만 맞춰질 것이며, 그녀가 겪는 고단한 이야기에 주목해달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송련이 부잣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이윽고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장이머우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인 송련의 얼굴은 보일 듯 말 듯 멀게 처리된다. 하지만 송련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짐짓 웅장하기까지 하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가 숲 정도는 아니라고는 알려주지만, 그래도 개발된 저작거리 등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와의 대화 하나 없이, 송련이 부잣집을 찾아가기 전 이야기한 상대는 어머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부잣집에 들어가서도 제대로 이야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송련의 운명마저 감지되는 분위기가 눈에 띠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부잣집에 당도한 송련. 그런데 역시 여기에서도 인물의 긴장과 불안을 드러낼 수 있는 클로즈업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송련이 앞으로 살게 될 부잣집이 어떤 곳인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싶어 하듯, 진씨 가문의 집 곳곳에서 인물이 비춰지는 식으로 영화는 이어진다. 그리고 송련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 본 집사와 대화를 시작할 때 그제서야 카메라는 두 인물을 비춘다. 그러나 이 장면은 곧 끝이 나고, 송련이 기거하게 될 후원을 찾아가는 인물의 발자국만이 분주하게 영화를 채운다. 이 장면에서도 집 곳곳을 보여주는 신(Scene)들이 나열된다.
자신이 기거하게 될 방에 도착한 송련이 집사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홍등이 많죠?” 그녀의 종인 ‘연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홍등이 가진 의미에 대해 관객은 궁금해 한다. 이런 관객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감독은 이윽고 송련의 후원 곳곳에 홍등을 배치하는 하인들을 비춘다. 홍등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개가 흡사 겨울날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고드름처럼 처마 밑을 까마득히 채운다. 그리고 홍등의 감각적이고 빼어난 구조가 눈에 띤다. 홍등의 의미는 앞으로 영화가 전개되면서 하나하나씩 밝혀지지만, 일단은 ‘아름답다’. 아직은 홍등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대충은 짐작이 가능하다. 즉, 홍등이 이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한 눈에 띠는 것은 사방이 기와로 꽉차있는 집에서 홍등이 내걸릴 부분만 연속적으로 비추는 장면이다. 이에 관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앞으로 네 명의 여인이 치열한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게 되는, 그리고 송련을 서서히 미쳐가게 만드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소라는 어떤 암시는 아닐까.
드디어 처음 본 대감과 초야를 치르게 된 송련. 송련의 방과 후원이 온통 홍등으로 물들어 있다. 홍등의 의미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순간이다. 홍등은 이 곳에 머무르는 여인네의 삶이다. 홍등이 켜지는 순간 그들은 환희와 희열을 맛보게 되고, 홍등과 멀어지게 된다면 집안에서조차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후에 송련의 종 연아가 자신의 방에 홍등을 훔쳐 달아놓은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장면은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송련의 방에 걸려 있는 홍등 때문에 송련의 얼굴조차 붉다.
대대로 한 자리에서 모임과 식사를 한다는 집사의 말이 들려오는 순간, 뒷배경으로 조상의 초상화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위세를 자랑하며 걸려있다. 우리는 사극에서 보지 않았는가. 우리의 조선시대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조상님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소원을 비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게다가 계속 집사는 ‘가풍’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송련이 시집 온 집이 얼마나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인지를 암시하는 장면이 여럿 있다. 이는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장이머우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홍등이 켜지지 않았어도 붉은 색채는 여인들의 방 곳곳에서 발견된다. 중국인들은 빨간색을 굉장히 선호한다. 빨간색에는 ‘기쁨’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은 가부장적인 남자들을 위해 한낱 노리개 역할을 해야 하는, 언제나 남자들을 기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깃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이머우는 이런 면에서 확실히 봉건을 비판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이 남자면서도 이런 점은 나쁘다는 생각이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부분에는 문혁기를 거치고 5.4신문화운동에 감명을 받았던 장이머우 개인의 일생이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자꾸만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것 같은 송련은 아프다던 셋째 부인 매산이 지붕위에서 노래를 부르자 그녀를 찾아간다. 매산이 등장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면 그녀의 의상은 항상 붉은 빛을 머금고 있다. 후에 술에 취한 송련의 실수로 그녀의 외도 사실이 밝혀지면서 끝끝내 지붕 위의 방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사실에서 비추어 본다면 영화에서 붉은 색이 반드시 좋은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색이기에 앞서 붉은 색은 인간이 피(血)색일 수밖에 없다. 중반부에 머리를 잘라달라고 요구하던 둘째 부인 탁운의 귀를 잘랐을 때가 유일하게 영화에서 진짜 피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이렇듯 피를 의도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직접적으로 내비쳤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알고보니 탁운은 매산보다 더 사악한 성질의 여자였고, 매산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말에 대한 일종의 암시는 아니었을까. - 탁운은 송련에게 붉은 색의 비단을 선물한다.- 또한 영화에서 이들의 과거가 (매산은 가수인 것만 제시) 밝혀지지 않는 것에서 추측해본다면, 이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결국 부정적 현실을 낳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면은 또한 다른 면에서 의미 있다. 이 때는 위에서 올려다본 진씨 가문의 집이 화면 전체를 통해 부각된다. 거대하고 웅장한 집은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숨조차 죽여야 할 것처럼 만들고, 실제로 사람들은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송련은 점차 깨닫는다. 그리고 이를 영화 후반부에서 직접 언급하면서 1년 남짓한 세월 동안 느꼈던 울분과 외로움에 대해 내뱉는다. 문혁이 인간 본성을 억압한 측면이 많았는데, 감독 역시 이를 느꼈을 것이며, 그 반감이 이런 장면을 통해 표출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시간은 흘러흘러 송련 역시 여인네들의 결투에 민감해진다. 결국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진맥을 통해 이것이 거짓임이 밝혀진다. 이 때문에 송련은 등을 봉하는 벌을 받게 된다. 등의 불을 끄는 멸등이 아니라 ‘봉등’인 것이다. 이 때, 등을 싸는 천은 검은 색이다. 검은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해본다면 왜 검은 천으로 싸는지를 알 수 있다. 검은색은 불길한 색이다. 선과 악을 나눌 때 후자가 검은색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검은색은 특히, 죽음 등과 같은 부정적 결말을 뜻할 때 많이 사용된다. 등을 검은 천으로 봉하는 것은 진씨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풍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송련의 등을 싸는 존재이기도 하다. 거짓말을 할 정도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이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송련의 미래가 암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검은색은 뒷부분에서도 한번 더 나오는데, 등을 훔쳐 방에 걸어놨던 연아가 송련의 손에 의해 발각되는 장면에서이다. 이 때, 등은 소각 되고 남는 재가 무릎을 꿇고 있는 연아의 앞에 남게 된다. 이제 계절적 배경은 겨울이라 온통 하얀 세상인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연아는 하나의 검은 점처럼, 재는 검디검은 최후의 모습만 남기고 있는 것이다. 연아는 결국 죽게 되고, 이는 송련이 미쳐가는 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제 결말에 다다랐다. 중간중간 삽입되었던 장면에서 집 전체 또한 햇빛을 받아 붉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자 아예 일몰하는 장면이 나오며 하늘은 온통 붉고 집은 그림자를 제 몸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검기만 하다. 빨강과 검정의 선명한 대비가 관객들의 눈을 빼앗지만, 이는 앞으로 펼쳐지게 될 인물들의 각기 다른 운명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송련은 미치고 매산은 죽게 되지만, 진씨 가문은 다섯 번째 ‘마님’을 들이면서 그들의 봉건적 제도는 수레바퀴처럼 끊이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고 있는 듯 하다.
고의원과의 외도사실을 걸리고 만 매산은 송련이 이렇게 살 바에야 그 방에서 목숨을 끊고 싶다던 방으로 끌려가 갇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매산이 장정들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끌려갈 때도 매산의 길을 비춰주는 것은 홍등이다. 바로 여기에서 홍등의 의미는 진화한다. 홍등은 곧 여인네들이다. 홍등이 켜지면 그들은 기뻐했고 봉등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최악의 상황이 매산에게 찾아왔다. 자신이 죽으러가는 길에도 홍등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가기 싫은 길을 가게끔 만드는 매개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매산이 방에 갇힌 후 홍등은 더 이상 매산을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홍등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곧 진씨 가문의 집에서도 벗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벗어난다는 자유는 곧 죽음이었다. 넷째부인 ‘역할’에 환멸을 느낀 송련도 가끔씩 혹은 거나하게 술에 취해 꿈꾸었을 그 환상. 그 환상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매산이 되었다는 사실에 결국 송련은 셋째부인의 후원에 스스로 홍등을 켜고 끝내 미쳐버리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진씨 가문에 다섯 번째 부인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제대로 혼인 장면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정말 ‘온통’이라는 부사가 가장 알맞을 정도로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한 배경과 인물이 등장한다. 이를 홍등의 붉은 색과 총제적으로 연결해 볼 수 있다. 홍등 자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인네의 삶을 그려내는 것이었다면 혼인 장면에서의 붉은 색은 이 붉은 색이 곧 홍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이 다섯 번째 부인도 봉건적인 굴레에 맞추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는 암시로 귀결되는 것이다. 송련보다 좀 더 어려보이는 외모에 혹자는 연민을 가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민을 주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린 다섯 번째 부인이 탁운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송련은 더욱 불운한 캐릭터이다. 좀 더 사악한 미소 한 번 지어보지 못했으며 ‘배운 사람’답게 지나치게 곧은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등 주변을 도는 송련의 모습이 처음 진씨가문에 발을 들였을 때와 같다. 옛날의 그 옷을 입고 옛날처럼 짐짓 귀여운 행동을 해보지만 송련은 더 이상 ‘송련’이 아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창문 틀 안에 갇힌 그녀의 모습이, 집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집 안에서 배회하는 그녀의 모습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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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 |
감독 |
장예모 (1991 / 중국, 홍콩) |
출연 |
공리, 김숙원, 공림, 조취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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